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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컴퓨터 제국의 중심에 있었던 IBM과 같은 거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80년 12월 애플은 드디어 주식을 공개했다. 애플은 1956년 포드 자동차 기업공개 이후 가장 많은 자본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그만큼 대단한 미래가치를 인정받았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애플의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애플에 이어 1980년 5월에 내놓은 애플 III는 반응을 거의 얻지 못하고 완전히 잊혀지기 시작했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자신의 시장을 노리는 정말 무서운 거인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플이 약진하기 이전에 '컴퓨터의 원조'라고 불린 기업은 빅블루라는 애칭으로 도 유명한 IBM이었다. 토마스 왓슨이 설립한 IBM은 기술 분야 최초의 대형 기업으로, 설립 이후 시종일관 업계를 지배했다. 흔히 TJ로 알려진 토머스 왓슨 1세는 1914년 IBM의 전신인 '컴퓨팅 - 태불레이팅 레코딩 회사'에 입사했다가 입사 11 개월 만에 사장이 되었다. 뛰어난 영업자였던 TJ는 용모와 태도가 반듯한 세일즈맨들을 중시했고,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와 실적 경쟁 그리고 직원 단합대회나 가족동반 야유회같이 애사심을 고취시키는 전략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기업경영 전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업들에게서 볼 수 있고 실제로 잘 먹히기도 한다. 1924년 TJ는 회사의 이름을 IBM으로 바꾸고, 도표 작성기와 출퇴근 기록기, 타자기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자계산기를 개발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정부의 관할 아래에서 폭격조준기나 라이플 같은 30여 종의 전쟁 관련 물품을 생산했다. 1940년대에는 아들인 토마스 왓슨 주니어가 경영 전면에 나선다. 1944년 IBM은 하버드 대학과 공동 연구를 통해서 '마크-1'이라고 하는 자동 순차 제어 계산 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기억장치를 집어넣어서 전자계산기를 컴퓨터로 진화시키는 데에는 경쟁사인 레밍턴 랜드에게 뒤지고 말았다. 레밍턴 랜드는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인 유니박(UNIVAC)을 개발해 IBM을 앞 |서 나갔다. 이런 차이는 토마스 왓슨이 연구보다는 영업에 중점을 둔 경영을 했기 때문인데, 왓슨 2세가 부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컴퓨터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어서 상황을 역전시킨다. 1952년 IBM은 학술연구와 국방 부분에 널리 쓰이게 되는 IBM 701을 발표하면서 컴퓨터 산업을 다시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후 발표된 후속 제품들도 큰 성과를 거두면서 '컴퓨터=IBM'이라는 등식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용 컴퓨터를 위시한 소형 컴퓨터의 부상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고, 그 결과로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 및 코모도, 아타리, 탠디 등 8비트 PC 생산 업체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IBM은 자신의 최초 데스크톱 컴퓨터 IBM 5100을 1975년에 소개했는데 문제는 가격이었다. 무려 2만 달러에 이르는 기계였기 때문에 커다란 기업들이나 대 학과 같은 곳들 이외에는 시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지지부진하던 IBM의 행보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IBM PC의 등장 IBM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 특성상 기존 인원을 운영해서 PC를 개발하기보다 는 새로운 디자인 프로세스와 패러다임에 적응하기 위해 스페셜팀을 구성했다. 이 프로젝트를 '프로젝트 체스'로 명명하고는 돈 에스트리지를 중심으로 12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들로 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딱 1년 내에 PC를 완성하라는 IBM의 지시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 돈 에스트리지는 모든 것을 직접 만들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기존 부품을 모아서 생산하고, 외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PC용 모니터와 프린터 디자인 등도 OEM을 활용하기로 결정하는데, IBM 재팬에서 개발한 모니터와 엡슨의 프린터 모텔을 채용했다.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개방형 아키텍처였다. 이를 통해 특별한 라이선스 없이도 주변기기를 다른 회사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하고, 소프트웨어도 쉽게 개 발하도록 했는데 이런 개념은 당시 IBM으로서는 대단한 혁신이었다. 개방형 아키텍처는 애플 역시 가지고 있었던 전략이지만 IBM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완 전한 회로도와 ROM BIOS 소스코드 등을 포함한 IBM PC 기술 레퍼런스 매뉴얼까지 공개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IBM은 1981년 8월 12일 역사적인 첫 번째 PC를 출시한다. 당시 IBM은 역사를 바꾼 몇 차례의 선택을 했다. 처음에 고려했던 CPU는 IBM 이 자체 개발한 RISC CPU 80 1이었다. 이 CPU는 인텔의 16비트 CPU인 8088 보다 몇 배는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시간의 압박과 저렴한 가격에 맞추기 위해서 IBM은 인텔과 손을 잡는 결단을 내린다. 비슷한 이유로 운 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MS-DOS를 채택했는데, 당시 IBM은 MSDOS보다 훨씬 앞선 유닉스 기반의 운영체제가 있었음에도 이를 8088에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 운영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이 결정은 결국 세상을 크게 바꾸었다. 만약 이때 IBM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CPU를 탑재하고, 유닉스 기반 운영체 제를 내장해서 PC를 내놓았더라면 마이크로소프트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IBM의 개방형 정책은 수많은 제조사로 하여금 IBM PC와 호환되는 제품을 만 들도록 유도했다. 컬럼비아 데이터 프로덕츠는 첫 번째 IBM PC 호환기종을 1982년 6월에 발표했으며 뒤를 이어 컴팩이 11월에 포터블 제품을 발표했다. 초기 IBM PC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성공은 호환 제품군을 생 산하는 많은 회사들과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한 소프트웨어 제국을 길러내는 데는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결국에는 오늘날 PC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결과를 낳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로 본사를 옮긴 이후, 여러 8비트 컴퓨터를 위한 베이 식 인터프리터를 구현하면서 점차 몸집을 불렸다. 엔지니어 위주 회사가 몸집이 불다 보니 회계와 관리를 포함한 경영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개발자 임금협상과 관련한 문제로 미국 노동중재위원회에 빌 게이츠가 불려 가는 일까지 생기면서 전문 경영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때 빌 게이츠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CEO인 스티브 발 머다. 스티브 발머는 빌 게이츠보다 한 살 어린 1956년생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스티브 발머는 공부도 잘했지만, 하버드 대학의 미식축구팀도 관리하고, 학교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에서도 일을 하는 등 매우 활발한 학교 활동을 했다. 빌 게이츠와는 기숙사에서 가까운 위치에 방을 얻어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접촉을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스티브 발머는 2년간 세계적인 소매업체인 프록터 앤드 갬 블(P&G)에서 일을 했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같은 사무실을 쓰던 제프리 이멜트는 훗날 GE의 CEO가 되었다.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신입 동료들이 훗날 세계 적인 기업 CEO로 다시 만난 것이다. P&G에서 나온 발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는데, 빌 게이츠의 부름을 받고 결국 MBA 과정을 중단했다. 당시로서는 작은 회사였던 마이크로소프트에 자신의 미래를 연 것이다. 발머를 합류시키기 위해 빌 게이츠는 정말 대단한 정성을 들였다. 미혼이었던 빌 게이츠는 스티브 발머를 시애틀 친가로 초대해서 부모님에게 소개하고 성대한 만찬을 열었다. 시애틀 관광도 같이 하면서 하루 종일 설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 머는 빌 게이츠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에 반해버렸다. 1980년 6월 11일,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스물네 번째 직원이 되었고 개발자 위주의 조직 안에서 경영관리를 전담한다. 스티브 발머는 직원들의 동기부여책으로 주식소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발머 자신도 1981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8퍼센트를 소유했고, 이후 스톡옵션을 고안해서 많은 직원에게 회사에 헌신할 수 있는 주인의식을 심어주었는데, 그 결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식 공개를 했을 때 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백만장자 반열 안을 받아들인다면 대단한 모험을 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꿀 기회가 왔다는 것 을 직감한 빌 게이츠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SCP)라는 회사가 CP/M을 기반으로 86-DOS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대담하게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0 86-DOS 라이선스 획득 86-DOS는 인텔 8086 16비트 CPU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CP/M 기 반 운영체제다. SCP는 자신들의 컴퓨터를 디자인하면서 인텔 8086에 맞게 개발된 CP/M을 채택하려고 했지만, 디지털 리서치는 계획만 발표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운영체제의 출시를 차일피일 늦추고 있었다. 이에 SCP는 스물네 살의 젊은 컴퓨터 천재인 팀 패터슨을 고용해 16비트용 CP/M 운영체제 개발을 맡겼다. 팀 패터슨은 CP/M과 호환되는 API를 가지고 86-DOS를 디자인했다. 동시에 CP/M을 쓰면서 불편했던 점들을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특히 CP/M의 파일 시스템 대신 FAT 파일 시스템을 채용했는데, 이는 인텔 8086 CPU용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베이식 -86에 이용된 방식이었고, 때문에 마이크로소프 트 베이식과는 호환성이 극대화되었다. IBM으로부터 일단 전권을 위임받은 빌 게이츠는 SCP와 협상을 통해 1980년 12월 25,000달러라는 헐값에 86-DOS에 대한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1981년 5 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팀 패터슨을 스카우트해서 IBM PC가 채택한 8088 CPU에 서 동작하는 운영체제를 개발하도록 했다. 1981년 7월, IBM PC를 출시하기 한 달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SCP로부터 86-DOS와 관련한 모든 권리를 50,000달러에 사들였다.

 

이때의 계약은 후일 SCP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디지털 리서치 사이의 법정 분쟁을 일으켰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SCP 측과 계약할 당시 IBM과 진행하던 프로젝트 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IBM이라는 거대한 기업에서 운영 체제로 사용할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SCP 사장은 너무나 싼 가격에 모든 권리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겨주었다. 법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의 계약관계를 SCP 측에 알릴 의무가 없었 다. 그렇지만 사실을 숨기고 시장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계약한 도의에 대한 불만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결국 마이크로소프트가 SCP 측에 100만 달러를 더 주는 수준에서 중재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86-DOS를 가지고 IBM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PC-DOS 1.0이다. IBM은 독점 사용권과 일시불 계약을 원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출시 시간의 압박을 최대한 이용해서 독점도 주지 않고 로열티 계약을 하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이 시행 한 개방형 정책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입었다. 이후 수많은 IBM PC 호환기종들이 나왔고, 이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 이니셜을 딴 MS-DOS를 판매했다. MS-DOS는 PC-DOS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운영체제로 오리지널 IBM PC를 제외한 호환 컴퓨터용으로 판매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베이식 이외에 독보적인 기술은 없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보력과 세상을 읽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운영체제 개발 경험이 하나도 없으면서 그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86-DOS의 존재를 미리 알 수 있었던 뛰어난 정보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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