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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터넷 브라우저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69년 9월 2일, UCLA의 레오나드 클라인록 교수는 실험실에서 몇 명의 컴퓨 터 과학자들과 데이터 몇 비트를 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로 회색 케이블을 통 해 전달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데이터가 전송된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 실험이 오늘날 전 세 계를 사실상 지배하는 인터넷의 첫 번째 태동이었다. 클라인록과 동료들은 이 연 구를 바탕으로 정부의 차세대 네트워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것이 바로 인터넷의 전신인 아파넷(ARPANET)이다. 일부에서는 인터넷 탄생일을 1969년 10월 29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0월 29일은 클라인록이 첫 번째 메시지를 UCLA와 스탠퍼드를 연결하는 2개의 노드 사 이에서 전송하는 데 성공한 날이다. 그 메시지는 'LO' 였는데, 클라인록이 'LOGIN'을 전송하려고 하다가 시스템이 다운되는 바람에 잘려서 전송된 문자였다. 즉 9월 2일은 최초의 데이터 비트를 실험실 내 컴퓨터들 사이에서, 10월 29일은 외부를 연결하는 컴퓨터 사이에서 전송한 첫 번째 날이다. 그로부터 40년간 인터넷은 미국의 군용 네트워크에서 전 세계를 연결하는 기간 백본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이메일과 TCP/IP 통신 프로토콜을 정립했고 이를 통해 정형화된 인터넷 주소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숫자로 되어 있던 주소체계에 이름이 붙으면서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com', '.org' 등이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1 팀 버너스 리와 웹의 등장 인터넷이 실제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웹이 등장하면서 부 터다. 영국의 물리학자였던 팀 버너스 리가 HTML 언어와 웹을 만들면서 인터넷 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 세계와 일상생활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9년 HTML과 웹 서버를 처음 만들었는데 최초의 웹 서버로는 넥스트 컴퓨터에서 생산 한 넥스트 큐브를 사용했다.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 과학 중심 웹 환경을 구축하던 팀 버너스 리는 1994년 MIT에 국제 웹 기술 표준화 기구(W3C)를 설립하고 웹과 관련한 다양한 표준과 권고안 등을 만들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웹 표준을 이끌고 있다. 사실 인터넷이 품고 있는 자유와 비특허, 비 로열티 정책은 W3C의 개방 철학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런 면에서 팀 버너스 리의 업적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넷스케이프 창업자로도 유명한 마크 앤드리센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깜짝 놀 라게 해서 흔히 나이가 많은 인물로 생각을 하지만, 1971년생으로 필자보다도 나 이가 어리다. 그가 일리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미국 국립 슈퍼컴퓨터 활용센터(NCSA)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마크 앤드리센은 대형 컴퓨터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컴퓨터에도 설치할 수 있고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를 원했다. 특히 웹의 가능성을 보고 웹에 있는 다양한 과학정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브라우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미국 국립 슈퍼컴퓨터 활용 센터(NCSA)에서 일하던 뛰어난 프로그래머인 에릭 비나와 함께 유닉스를 기반으로 하는 웹 브라우저를 개발한다. 이들은 3개월에 걸친 작업을 통해 1993년 웹브라우저 역 사에 길이 남을 범용 브라우저인 모자이크를 완성한다.

 

마우스만으로 인터넷을 브라우징 하는 클릭 앤드 포인트 방식을 처음 구현한 모 자이크는 인터넷이 진정한 정보의 바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 들의 성취를 보고 NCSA에서는 인원을 몇 명 더 보강해서 PC와 매킨토시를 지원하는 모자이크도 같은 해 11월 발표했다. 2달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브라우저를 다운로드하여 이용하면서 인터넷 웹 시대를 화려하게 열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던 탓인지 NCSA에서는 에릭 비나를 중심으로 정규 모자이크 개발팀을 관리하려고 했고 마크 앤 드리센을 홀대했다. 그러자 마크 앤드리센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NCSA와의 관 계를 정리하고 실리콘밸리로 이사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처음 자리 잡은 회사는 EIT(Enterprise Integration Technologies)였는데, 이 회사는 주로 보안과 관련한 일을 하는 회사로 인터넷 브라우저와는 거리가 먼 사업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앤드리센은 재직 중에 실리콘 그래픽스를 창업한 사람이자 일생일대 의 귀인이 되는 짐 클라크를 만난다. 투자자와 당돌한 젊은이의 만남 실리콘 그래픽스로 성공을 맛본 짐 클라크는 창업 초기 2년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벤처투자자에게 너무나 많은 지분을 양도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서 실리콘 그래픽스의 실권을 쥐고 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 역시도 회사를 운영하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돈을 활용해서 새로운 투자를 하고 싶어 했다.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는 실리콘 그래픽스 동료였던 빌 포스의 주선으로 만 났다. 짐 클라크는 바로 미래 컴퓨터 환경이 웹과 웹브라우저 기반의 산업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 마크 앤드리센에게 모든 자금을 지원할 테니 창업하라는 제안을 했다. 용기를 얻은 마크 앤드리센은 짐 클라크에게 440만 달러를 받아서 실리콘 밸리의 마운틴 밸리에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 회사가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이다.

 

창업을 한 마크 앤드리센은 과거 모자이크를 같이 만들었던 NCSA의 동료들을 불러들여서 새로운 웹 브라우저 개발에 들어갔다. 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과 개발 인원을 데려간 것 그리고 이에 따른 특허 침해에 대해 모교인 일리노이 대학과 NCSA의 항의를 받자 회사 이름을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스로 바꾸고 합의금으로 300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그렇게 탄생한 웹브라우저가 바로 초기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는 조타수 역할을 해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다. 회사를 창업하고 개발에 매진한 결과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첫 버전을 1994 년 10월에 공개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2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AOL이 주도하던 PC 통신 서비스 시장을 인터넷 위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네비게이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던 케텔(KT에 인수되어 이후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서비 스), 피시서브(이후 천리안으로 통합) 등 PC 통신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접속 단말 소프트웨어가 경북대학교 하늘소 동아리에서 만든 '이야기'였다. 그 중 멤버였던 황태욱은 'Itaeuk' 이란 이름으로 트위터에 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네비게이터가 탄생하고 웹 서버가 대중화되자 인터넷이 폭발하면서 PC 통신 서비스 업체들과 이와 관련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들이 가장 큰 직격탄을 맞았다. c 세상의 중심에 선 인터넷 오늘날 인터넷의 성공은 네비게이터에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인터넷에 접속했고, 컴퓨터의 용도가 업무용에서 인터넷을 서핑하기 위한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5년 8월, 짐 클라크는 아무런 수익도 없었던 넷스케이프 사를 IPO(기업공개)하는 모험을 시도하는데, 당시 '인터넷 넷스케이프'라는 동 식이 성립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미래 가치'라는 단 하나의 무기로 나 |스닥 상장에 도전했다. 주간사들은 비교적 낙관적으로 '미래 가치'를 계산해서 주당 28달러에 상장하기로 결정했다. 이것도 처음에는 14달러가 적정하다고 조언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2배인 28달러로 결정해서 올린 것이었다. 이제 일반인들이 이 가치를 믿고 사줄 것인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던 1995년 8월 9일, 넷스케이프 주식은 첫날 무려 75달러까지 치솟았다. 물론 장이 끝나는 시점에는 58달러 정도로 다시 낮아지기는 했지만 넷스케이프 주식 공개는 인터넷에 대한 미래와 사람들의 기대감을 표현한 첫 번째 신호탄이었고 달리 말하면 이날이 바로 닷컴 버블의 첫날이었다. 이 날부터 스물네 살의 젊은 청년 마크 앤드리센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며 빌 게이츠와 쌍벽을 이루는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결국에는 빌 게이츠에 의해 넷스케이프가 처절하게 실패하게 될 줄은 이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95년 웹은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PC 통신 중심의 네트워크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네비게이터는 웹의 상징이었고 네비게이터를 이용해서 인터넷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다른 브라우저는 존재 의미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렇게 급격히 커지는 웹 환경을 바라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NCSA에서 모자이크를 라이선스 한 뒤에 이를 기반으로 만든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도전장을 낸다. 1995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95를 발매했는데, 처음 발매할 때에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8월 달에 발표한 윈도 95 플러스 팩(Plus Pack)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탑재시켜 발표했다. 윈도 95가 화제를 모으며 전 세계 PC 시장을 휩쓸었지만 웹브라우저 점유율에 있어서는 네비게이터의 상대는 안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2.0은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임을 직감한 넷스케이프도 이에 질세라 발 빠르게 버전업을 하면서 대응했다. 경쟁이 가열되면서 브라우저 안정성을 확보하거나 버그를 교정하려는 노력보다 새로운 기능 개발에 집중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네비게이터는 자바 스크립트와 Blink, Marquee(글자가 번쩍거리거나 흘러가게 하는 명령어) 같은 비표준 HTML 태그를 지원했고 익스플로러는 JScript 등으로 대항했다. 이러한 과도한 경쟁은 점점 브라우저 성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웹 표준에 맞지 않는 웹 페이지들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비록 운영체제를 독점하는 회사였지만 익스플로러가 네비게이터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 버전까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익스플로러 3.0을 1996년에 발표하면서 서서히 네비게이터의 점유율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익스플로러는 브라우저 중에서 처음으로 CSS를 구현하면서 대중화의 전기를 마련했지만 겨우 10퍼센트를 넘는 점유율이 고작이었다. 1997년 10월에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4.0이 발표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72 대 18로 압도적인 열세에 몰렸던 익스플로러는 아예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와 통 합해서 발표하면서 전세를 뒤집기 시작한다. 사용자가 윈도 95나 이후에 출시된 198을 설치하면 자동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도 설치되었고, 이미 브라우저를 가진 사용자들이 중복으로 네비게이터를 다운로드하는 일이 줄어들면서 판세는 급격히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기울었다.

 

운영체제에 끼워 팔기를 하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승기를 잡았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는 역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을 통한 것이 아니라 끼워 팔기로 시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결국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1998년 미국 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기소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브라우저 끼워 팔기였다. 이 사전은 2001년 11월 2일 미국 정부와 마이크로소프트 간 합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종결이 되었다(여러 주정부의 입장 차이로 완전한 결정은 2004년으로 늦춰졌다). 서드파티 회사들을 위해 응용 프로그램 인터 페이스(API)를 공유하고 5년간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스템, 기록, 소스코드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3명의 패널을 지정하게 했다. 이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가 과도한 장벽을 칠 수 없도록 규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신들의 코드를 바꾸거나 다른 소프트웨어를 같이 묶어 파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제재를 내리지 못했다. 비슷한 혐의로 시작된 유럽에서의 재판은 웹 브라우저를 분리하도록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새로운 브라우저 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에게 경쟁에서 패한 넷스케이프는 더는 독자적으로 회사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최대 PC 통신업체였던 AOL에 42억 달러를 받고 회사를 매각한다. 이후 익스플로러의 독주는 계속되고 2002년에는 무려 96퍼센트라는 대단한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정점에 오른다. 물론 우리나라는 이보다 훨씬 심하다. 닷컴 시대의 화려한 황태자 넷스케이프는 이렇게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AOL에게 매각된 1998년 이후 오픈소스 혁신을 주도하는 또 하나의 그룹인 모질라 재단이 탄생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AOL이 인터넷 브라우저 사업을 완전히 포기한 2007년부터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대항마이자 기존 네비게이터를 계승, 발전시킨 파이어폭스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었다. 넷스케이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을 바꾼 넷스케이프, 다시 한번 공룡 같은 힘으로 넷스케이프를 굴복시킨 마이크로소프트, 경쟁자가 없던 마이크로소프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모든 적을 굴복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권력을 몇 개 회사가 아니라 대중이 갖는 인터넷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으로 인터넷 브라우저 시대는 열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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